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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약진 운동(r12 Bl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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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류:청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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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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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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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약진 운동(大躍進運動, the "Great Leap Forward" movement)''' 은 청평대제국에서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청평 공산당의 주도로 실시된 경제·사회 개발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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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당시 청평 지도부는 랜드해협 국제질서를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경쟁 구도로 바라보았다. 자본주의 진영에서 루이나가 선도국, 플로렌시아가 그 뒤를 잇는 국가로 자리 잡았다면, 공산주의 진영에서는 사비에트가 선도국이며, 청평은 그 다음가는 핵심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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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이에 청평은 단기간에 농업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리고, 철강과 공업 생산에서 플로렌시아를 추월하여 루이나와 대등한 수준으로 도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궁극적으로는 사비에트와 함께 공산권의 양대 축을 이루어 사회주의 체제의 위상을 세계적으로 과시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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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그러나 운동은 비현실적인 계획, 기술적 한계, 주민 강제 동원, 과장된 성과 보고, 부정부패로 인해 처참히 실패하였다. 농업 기반은 붕괴하고 대규모 기근이 발생했으며, 사회 전체가 심각한 퇴보를 겪었다. 결과적으로 청평은 공산권의 제2의 중심국가로 도약하기는커녕, 수십 년간 경제·사회 발전에서 뒤처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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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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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정식 명칭은 제2차 5개년 계획으로, 그 유명한 토법고로와 제사해 운동 역시 청평 대약진 운동의 일부분이었다. 수천만 명에 이르는 아사자가 속출하고 경제가 후퇴했다는 점에서, 현대 청평사에서 이 운동은 지도부의 최대 과실로 지목되며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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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청평의 대약진 운동은 국가를 후퇴시킨 대실책으로 평가되며, 이후 벌어진 문화혁명과 함께 청평 전체의 문화적·경제적·사회적 수준을 20년 이상 퇴보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이로 인해 청평 전역에서 기근이 발생해 3천만~5천만 명이 굶주림으로 사망하였다. 이는 청평 민간인 대학살이나 홀로코스트와 비교해도 수십 배에 달하는 규모로, 지도자의 무능과 오만이 얼마나 치명적인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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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청평의 경제성장률 통계를 살펴보면, 지도부 시절 내내 성장이 낮았던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1차 5개년 계획에서는 두 자릿수에 가까운 고성장률을 기록하기도 했고, 1970년대 초반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도 10%대 성장률을 달성한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대약진 운동 시기인 1980년과 1981년에는 -25%, -27%라는 충격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이전 성과를 모조리 상실했다. 이후 실권을 잡은 개혁파에 의해 다시 4년간 10%대 성장이 이어졌지만, 곧 문화혁명이 발발하며 사회혼란으로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혼란이 진정된 뒤 기저효과 덕에 일시적 고성장이 있었으나, 1980년대 중반에는 다시 침체 국면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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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이처럼 두 차례나 경제성장의 성과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탓에, 같은 시기 유고랜드가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세를 유지하며 1인당 국민소득을 수십 배 늘려가는 동안 청평은 고작 몇 배의 성장을 이루는 데 그쳤다.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유고랜드와 청평의 소득수준 차이는 크지 않았지만, 청평 지도부가 사망한 1980년대 중반에는 청평의 1인당 소득이 200달러에도 못 미친 반면, 유고랜드는 열 배를 웃도는 격차를 보였다. 이후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 들어서는 격차가 더 줄어들어, 유고랜드가 청평 경제력의 잘반 이상인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는 청평의 국제적 위상을 급속히 떨어뜨렸으며, 서방 자본주의 진영의 완전고용과 안정적 성장과 대비되어 더욱 뼈아픈 비교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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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물론 청평 체제 하에서는 일정한 복지가 존재했다. 집은 국가에서 배분해주었고, 도시 노동자는 평생직장이 보장되며 의료를 무상으로 제공받았다. 때문에 실질 구매력은 단순한 달러 수치보다 다소 높았지만, 북산과 유고랜드에서 컬러 TV와 첨단 가전제품이 보급될 때, 청평의 대다수 시골 마을은 전기와 상수도조차 설치되지 않은 곳이 허다했다. 자가용이라 해도 자전거가 고작이었다. 이는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이라는 두 차례의 대실패가 청평의 잠재력을 얼마나 갉아먹었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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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사건의 기원에는 북산과의 경쟁이 있었다. 북산이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공업육성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대규모 산업화를 추진하자, 청평 지도부는 이에 강한 자극을 받았다. 북산이 자본주의 진영 내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청평은 공산주의 진영에서 사비에트에 이어 자신들이 두 번째로 선도적 위치에 올라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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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이에 청평 지도부는 단기간에 농업과 공업을 동시에 증산하여, 북산의 성장세를 따라잡고 나아가 플로렌시아를 능가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리하여 시작된 것이 바로 제2차 5개년 계획, 즉 대약진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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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청평 공산당은 이 운동을 ‘농촌이 주체가 된’ 최초의 혁명이라 규정했다. 지도부는 기존 혁명이 도시 노동자에 의해 추진된 것이었다면, 이제는 농민들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대규모 도시 제철소나 자동차 공장을 짓는 대신, 농민들이 토법고로를 쌓아 철을 만들고, 농촌에서 자체적으로 트랙터를 조립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는 ‘우리식 혁명’이라 불렸지만, 결국 현실성 없는 공상에 불과했다. 산업화에는 도시 인구의 확대와 체계적 생산시설이 필수임을 간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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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부 개혁적 인사들은 이미 이 계획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그러나 최고 지도부는 충언을 묵살했을 뿐만 아니라 반대자들에게 자아비판을 강요하며 숙청을 단행했다. 1차 5개년 계획이 나름 성과를 거둔 경험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해, 지도부는 자신들의 무오류성을 맹신하게 되었고, 권위주의적 체제 속에서 누구도 제동을 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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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특히 군 원로와 개혁파 인사들이 직언하다가 숙청되거나 실각하면서, 권력 내부의 견제 기능은 완전히 무너졌다. 지도부는 경제와 사회가 붕괴하는 현실을 직감하면서도 계획을 고집했고, 그 결과 기근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최후에는 자연재해까지 겹쳐 수천만 명이 아사한 뒤에야 해외로부터 긴급 식량을 수입하고 일부 정책을 수정했지만, 이미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은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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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결국 청평의 대약진 운동은 문화혁명과 함께 당조차도 인정하는 역사적 실책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청평에서 사회비판적 영화나 소설이 검열을 피하기 위해 과거를 빌려 현 체제를 은유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단골 소재가 된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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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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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플로렌시아]]는 철강을 연간 2천만 톤 생산하고 있다. 15년 후에는 3천만 톤까지 늘어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청평]]은 어떻게 될까? 15년 후 우리는 철강 4천만 톤을 생산하게 될 것이다. 그리되면 플로렌시아를 능가하게 된다. 올해 우리는 520만 톤을 생산했고, 앞으로 5년 뒤에는 1천만~1천5백만 톤, 다시 5년 뒤에는 2천~2천5백만 톤, 또 5년 뒤에는 3천~4천만 톤에 이를 것이다. 지금 내가 다소 과장되게 말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허공의 공상이 아니라 충분한 근거를 가진 자신감이다. '''[[북산]]의 동지들이 ‘5년 안에 [[빌베른]]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15년 안에 우리 또한 [[플로렌시아]][* 당시 랜드 경제 순위는 [[루이나]]가 1위, [[사비에트]]가 2위, [[플로렌시아]]가 3위였다. 물론 ([[청평]]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플로렌시아는 아직 [[제2차 랜드 대전]]의 전후 복구 단계였고, 배급제가 [[1954년]]에 들어서야 폐지될 만큼 풍족함과는 거리가 있는 시절이었다.]를 추월할 수 있음을 나는 확신한다.'''"
39>----
40>대약진 운동을 선포하는 [[청평 공산당 지도부]]의 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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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청평 지도부는 늦게나마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설비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식량을 비축하고 이를 해외로 수출하였다. 일례로 1959년, 청평은 대도시 주민 전체가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분량의 식량을 비축했는데, 이 가운데 상당량을 외화 확보 명목으로 수출해버렸다. 그 결과 베르샤, 띠에우리엔, 남강과 같은 주요 도시들에서 식량 공급이 끊겼고, 1960년 한 해에만 수천만 명이 배급을 받지 못했다. 배급 상황은 참담하여 한 달에 1인당 돼지고기 100g이 고작이었으며, 곡물은 턱없이 부족해 영양실조와 부종에 걸리는 사람이 속출했다. 부종 환자는 병원에서 진단서를 떼어야만 황두와 흑설탕을 소량 배급받아 영양을 보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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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청평 지도부는 북산을 견제하기 위해 무리한 규모의 군사력 증강을 계속했다. 핵 개발, 대규모 병력 유지, 신형 무기 도입에 막대한 자원이 투입되었으며, 동시에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원조와 동맹 지원에도 돈과 곡물을 쏟아부었다. 지도부는 이미 1958년부터 식량 부족 현상을 보고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획을 멈추지 않았고, “희생은 필연적”이라는 구호 아래 인민에게 더 많은 부담을 강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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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대약진 운동 이전 청평은 사비에트를 본보기로 삼아 국가 운영 전반을 설계했다. 지도부는 “사비에트가 짧은 기간 안에 후진 농업국에서 선진 공업국으로 변모했듯, 우리도 그 길을 따라야 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적극적으로 원조를 요청했다. 실제로 수많은 설비와 기술자가 사비에트에서 유입되었고, 이 과정에서 청평의 초기 산업화 기반이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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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1950년대 초반, 청평은 연 20%의 성장을 목표로 내세우며 사비에트에 수백 개 산업 플랜트 건설을 요구했으나, 당시 노스탈린은 이를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계획으로 간주하고 절반 이하로 줄여 승인했다. 청평 지도부는 불만을 품었지만, 노스탈린의 권위 앞에서는 공개적으로 반발하지 못했다. 대신 경제 관료들은 균형재정과 물가 안정을 중시하는 현실적 정책을 병행했고, 그 결과 제1차 5개년 계획은 연평균 9% 성장이라는 나쁘지 않은 성과를 기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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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사비에트가 여전히 압도적 군사·경제 대국으로 군림하는 가운데, 청평은 ‘2위 국가’로 고착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북산이 루이나의 지원을 받아 공업화를 가속화하는 모습은 청평의 불안감을 더욱 자극했다. 결국 지도부는 “플로렌시아를 7년 안에 추월하고, 15년 안에 루이나를 따라잡겠다”는 과격한 구호를 내걸었다. 안정 성장을 주장하던 경제 관료들은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낙인이 찍혀 자아비판을 강요당했고, 청평은 점차 무리한 속도전과 과잉 목표로 나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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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당시 청평의 경제는 전후 복구와 안정 성장으로 그럭저럭 괜찮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으나, 산업 기반이 약해 여전히 농업이 중심이었다. 다른 서방국가들도 전쟁 후유증에서 막 벗어난 시기였기에 경제 발전의 정점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도부는 이를 간과한 채 무리한 속도전을 추진했다. 플로렌시아는 여전히 전후 배급제를 시행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나, 청평은 이를 추월의 기회로 착각했다. 그 결과 철강 생산 목표를 5년 뒤 1천만 톤, 10년 뒤 2천만 톤, 15년 뒤에는 4천만 톤으로 설정하는 등, 현실과 괴리된 수치가 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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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이러한 계획은 사실상 국가적 허세였다. 하지만 지도부는 청평을 단순히 ‘인구만 많은 나라’에서 벗어나 단기간에 공업을 육성해 “국제사회에서 큰소리치는 강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문제는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치밀한 계획과 안정된 기반 구축보다는 당장의 성과에 집착하여 속전속결식 대책을 남발했다는 것이었다. 전시행정이 난무하며, 무리한 증산 운동과 허위 보고가 체계적으로 만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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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결국 1968년 산업생산량이 단기적으로 50% 이상 급증하는 호조를 보였지만, 이는 허상에 불과했다. 1969년부터 아사자가 속출했고, 연이어 발생한 흉작은 농업 생산량을 10년 전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저질 공산품과 소비재가 넘쳐나 국방력마저 약화되었으며, 곳곳에서 배급이 끊겨 전국 인민은 건국 직후보다도 더 참혹한 고통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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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이렇게 대약진 운동은 청평을 고도 성장의 길로 인도하기는커녕, 북산을 견제하려는 조급한 경쟁심과 지도부의 오만 속에서 인류사 최악의 기근과 경제적 퇴보를 초래하였다. 개발도상국의 선도국을 자처하던 청평은 오히려 플로렌시아를 따라잡기는 커녕, 유고랜드에까지 추월당하며 국제적 위상이 추락했고, 이는 수십 년 동안 회복되지 못한 치명적 상처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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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전말 ==
61=== 농업집단화 ===
62=== 터무니없는 예상치 잡기 ===
63=== 삼림 파괴 ===
64=== 토법고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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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제사해 운동 ===
66==== 살충제 남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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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심경밀식 ===
68=== 억지로 휴경지 만들기 ===
69=== 가축 폐사 ===
70=== 치수사업 ===
71=== 공포정치와 학살 ===
72== 결과: 삼년대기근 ==
73== 끝없는 식량 징발 ==
74== 숨겨진 원흉 ==
75== 이후 ==